판다투어

판다투어
로그인 회원가입
  • 여행정보
  • 여행지정보
  • 여행정보

    틀에 박힌 여행은 이제 그만!

    여행지정보

    틀에 박힌 여행은 이제 그만!

    [ 태항산 ]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 맨손으로 일군 태항산(太行山) 궈량동(郭亮洞)

    페이지 정보

    작성자 판다투어   조회Hit 8   작성일2025-11-27

    본문

    5e2deca99314c046fb1e89bd9b710b9e_1764218961_6488.jpg
     


    '세계 9대 불가사의'라 일컬어지는 인공 터널 '궈량동(郭亮洞)'이 또한 유명하다. 예로부터 궈량춘에서 외부와 통하는 길은 오직 협곡과 절벽 위를 이어주는 '천제(天梯)' 뿐이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오르내리는 것도 너무 위험했다.

    1971년 가을, 마을 서기였던 선밍신(申明信)의 제의로 선신푸(申新福), 왕휘이당(王懷堂), 선푸구이(申福貴) 등이 밧줄을 사용해 절벽의 높이와 거리를 측정했고 전통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상급기관의 전문가에게 터널 공사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마을 사람들도 인공 터널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자발적으로 산양, 약초 등을 내다 팔아 해머, 정 등 돌 깨는 장비를 구입했다. 전기도 없고, 기계도 없는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13명의 ‘동굴 굴착 돌격대’를 조직했다. 허리에 줄을 감고 절벽에 매달려 정으로 돌을 깨 홍암절벽 곳곳에 일렬로 발파구를 만들었다.


    13명의 청년들은 궈량춘의 유일한 절벽 길인 '천제' 아래 모여 반드시 절벽을 뚫어 길을 내겠다고 다짐하고 1972년 3월9일 본격적인 터널 공사에 들어갔다.


    궈량춘은 해발 고도가 높고, 경작지가 적고, 농사가 가능한 서리 없는 날도 짧았다. 1년에 단 한번 농작물을 파종해 살아가는 가난한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13인의 돌격대'도 0.12위안의 식비로 모두가 버텨야 했다. 강냉이로 만든 죽, 떡, 찜이 하루 세끼의 전부였다. 매일 한 사람에게 배당한 옥수수가 두근 밖에 되지 않았다.


    1975년 말, 공사는 가장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마을 사람들에겐 더 이상 내다 팔 산양도, 나무도 없었다. 식량도 떨어졌다. 어느 곳을 찾아봐도 동전 한 닢 나올 곳이 없었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하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팔을 걷고 나섰다. 새벽 5시에 일어나 5km의 산길을 올라가 두더지처럼 구멍을 파고 또 팠다. 마을 서기에겐 도화선과 폭약 등 굴착 장비를 빨리 구해오라고 다그쳤다.


    궈량춘 절벽의 평균 높이는 약 105m. 절벽 중간에서 발파 작업을 하려면 밧줄이 필요했지만 이를 살 돈이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자 집집마다 소의 고삐를 풀어와 하나 하나 이어서 밧줄을 만들었다.


    공사 인부로 나선 청년들은 목숨을 건 열정으로 절벽의 도랑을 길로 바꿔 놓았다.


    궈량춘 사람들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5년 동안 거대한 절벽에서 2만6000㎥의 돌덩어리를 캐냈고, 정 12톤을 마모시켰고, 8파운드짜리 쇠추 4000개를 소모했다.


    70세의 노인부터 10대의 소녀까지 공사에 참여해 하다못해 돌가루를 실어 나를 정도였다. 커다란 돌덩어리는 손으로 들어서 옮기고, 작은 것은 광주리나 바구니에 담아 어깨나 머리에 걸쳐 운반했다. 손가락마다 피가 터지기 일쑤였다.

    가장 힘든 공정 때는 현 교육국의 전문가 100여명이 위엔융(原永) 국장과 함께 공사 현장에 합류, 빠른 진행에 힘이 돼 주었다.


    마침내 1977년 5월1일 '절벽장랑(絶壁長廊)'이라 불리는 궈량 터널은 왕후이당 등 희생자들을 남기고 공식 개통됐다.


    궈량동은 절벽을 횡으로 1.25km나 뚫어나가면서 높이 5m, 폭 4m로 만든 터널이다. 태항산 동쪽에 만든 '인공천하(人工天河)' '홍치쥐(紅旗渠)'와 함께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실례이자 가난한 민초들이 일궈낸 '기적'으로 자리매김했다.


    궈량 터널에는 절벽 쪽으로 크고 작은 구멍 35개가 나있다. '천창(天窓)'이라 불리는 통풍구이고 채광창이자 전망대다. 공사 중에는 굴에서 캐낸 돌을 밖으로 내놓는 배출구 역할까지 했다.


    궈량춘에는 곽씨와 더불어 신씨들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원말 명초, 신씨 일가는 난징에서 관직을 맡고 있는 권세가였다. 그러나 주원장이 권력을 잡자 도읍의 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인적 청산'을 단행했다. 신씨 가문은 서역의 칭하이(靑海)로 쫓겨 갈 상황이 되자 산시로 도주했다. 수백여명의 일가 친척의 식사를 한꺼번에 만들 수 있는 커다란 가마솥을 쪼개 집집이 나눠줬다. 동서로 흩어졌다 훗날 다시 만나면 원래대로 붙일 심산이었다. 그래서 '큰 가마솥 신(大鍋申)씨'라 불린다.


    당시 궈량춘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신씨들은 지금도 이 곳에 살고 있고, 그  후손들이 바로 궈량동을 만드는데 앞장 선 사람들이다.


    궈량춘에는 항일 전쟁 중에 팔로군 사령부가 있었고, 산 아래는 리샹양(李向陽)이 이끄는 '평원유격대'의 근거지였다.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태항산의 협곡을 끼고 온갖 풍파를 이겨낸 궈량춘은 '중국 제일의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 받고 있다. 셰전(謝晉)이 연출한 '청량사의 종소리(淸凉寺的鐘聲)' 등 40여편의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태항산 일대에는 인간의 무한한 힘을 보여준 궈량 터널 외에도 5곳의 인공 터널이 더 있다. 쿤산(昆山) 터널, 시야(錫崖) 터널, 후이롱(回龍) 터널, 징디(井底) 터널, 전쟈위안(陳家園) 터널 등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5건 3 페이지
    • RSS

    검색